너의 그 한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너의 그 작은 눈빛도 쓸쓸한 뒷모습도
나에겐 힘겨운 약속
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 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네
슬픔은 간이역의 코스모스로 피고
스쳐 불어 온 넌 향긋한 바람
나 이제 뭉게구름 위에 성을 짓고
널 향해 창을 내리 바람 드는 창을
너의 그 한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너의 그 작은 눈빛도 쓸쓸한 뒷모습도
나에겐 힘겨운 약속
- 산울림, '너의 의미'(1984)
너의 의미(Your signals)
최빛나/현시원
남화연의 <오퍼레이셔널 플레이Operational Play>라는 작업에 풍덩 빠진 두 여인은 이 작업이 그들에게 작전하는, 말하자면 그들의 마음과 지성을 동하는 방식과 의미를 공동 발설해 보기로 결심한다. 각자가 현재 거주하는 서울-유트레히트, 낮과 밤을 오가며 주고 받은 아래 워키토키의 발췌문은 그러한 결심의 발화이자 오로지 잠정적일 뿐인 마무리이다. 그들은 “한쪽에는 사냥과 술책과 신나는 흥겨움과 솜씨의 멋있는 세계가 있었고, 다른 한쪽엔 동경과 좌절된 상식의 세계가 있었다“ 라는 <파리대왕>의 한 구절을 워키토키의 원칙으로 삼았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워키토키도 이 얼토당토 않은 작전명의 관습도 제 2차 세계대전 즈음에 발명,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너의 의미'는 그들의 작전명. 그들의 작전도 <오퍼레이셔널 플레이>의 몸짓을 닮았을까?
몸짓
이 인용으로 시작한다. 영국 출신의 인류학자 사회학자 싸이버네틱스 이론가인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메타 로그' 중 '왜 프랑스 사람들은?’의 한 구절이다. 아버지와 딸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된 '메타 로그'는 대화 중 손동작에 분주한 프랑스 사람을 두고 한 딸의 질문으로 시작해 이렇게 끝이 나지.
아버지: 그러니까 우린 완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까. 언어가 다른 그 무엇보다 바로 몸짓의 체계라고 가정해야 하는 거지. 동물들을 봐, 몸짓과 목소리의 톤 그게 다라니까. 단어들은 후에나 고안된 거지. 그리고 나서 선생님이라는 게 필요하게 된 거고.
딸: 아빠?
아버지: 응.
딸: 사람들이 말을 버리고 오로지 몸짓만 사용하기로 한다면 그게 좋은 일일까?
아버지: 음. 글쎄. 물론 우리가 하는 이런 대화야 못하겠지. 짖어 대거나 음매 하고 소리를 내거나 우리의 팔을 흔들거나 웃거나 으르렁대거나 흐느끼거나 하는 게 전부겠지? 하지만 재미있기도 할걸? 삶이 마치 발레처럼 보일 꺼야. 발레인들이 스스로 만든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삶 말야.
-'메타로그: 왜 프랑스 사람들은?', 그레고리 베이트슨, (1974)
흥미로운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비 전문 참여 퍼포머들의 퍼포먼스가 '곰배팔이짓'처럼 거슬렸다는 평론가 이정우씨의 짤막한 코멘트를 보면서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지. 이 사람이 중요한 지점을 읽지 못하고 있다. 작전명이라는 단어와 텍스트(희곡)라는 프로젝트의 시작과 그 시작을 일어내는 과정에 담긴 의미 말이지. 실체가 없는 텍스트를 "일상"으로, 공동으로 잡아 흔들어놓는 과정의 의미 말이지. 하지만 동시에 뜰끔. 만약 전문적인 몸짓과 코레오그래피(choreography)였다면 작품이 더욱 커다란 힘을 발휘했을런지도 모른다. 이 단련된 근육과 동작이 전혀 환상적일 것 없는 "미지의 세계"와 대면할 힘으로 주어질 수도 있었다라는 추측.
"아이스버그", "자살한 왕들"의 연기는 다들 무용인지 연기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지. 그들의 연기는 영화나 무용이나 비디오 등 예술 장르에 수용되기엔 기막히게도 어설픈 것이었다. 하지만 이 어설프고 덜 다듬어진 것들은 급작스러운 퍼포먼스를 기록하게 하는 유용한 대화방식이 아니었을까. 대화라는 것이 언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게 아니라 주변 공기와 상황, 카메라가 돌아가는 현장, 그리고 "자 도세요, 됐습니다", "왼쪽으로 가세요, 아니오 오른쪽으로요" 라고 말하는 "오퍼레이터"의 말이 들려오는 모든 뒤범벅된 활동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때 말이지.
그 어처구니 없는 몸동작이, 웃음이 터져나올 만큼 괴상한 짓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과장된 행동이라고는 "여왕"(유트레히트)의 표정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사실은 소박하고 군더더기 없는 행동들이 이 작업의 주요한 표현법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면이나 아주 간소한 소도구들만을 통해서 이 희곡에 불려져 나왔으니까. 이들에게 어떤 성품이나 기존의 연기력, 몸짓, 독특한 몸동작이 가능하단 식의 '필연성'이란 중요하지 않다. 작전명이라는 캐릭터는 그냥 뚝 떨어진 거니까. 실로 수많은 전쟁과 정치적 사건들이 폭탄처럼 방향은 계획적이지만, 그 방향의 근거는 터무니없이 우발적인 데에서 발생한 것이 많은 것처럼. 그러니까 이들이 각각의 작전명-캐릭터를 잘 짜인 이미지로서 구현해야 할 이유는 없는 거지.
하지만 퍼포머들은 기어이 자신의 연기를 끝마치기 위해 노력한다. 카메라가 쉴 때, 아니 정확히 쉴 때가 나오진 않지만, '컷' 하고 난 후엔 몸의 긴장이 풀어진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들은 최소한 가면에 적응하기 정도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말, 어른들이 짜놓은 질서를 흉내내려고 무의식 중에 애를 쓰는 것처럼. 이들의 희한한 연기 패턴은 작업의 구조, 나아가 작전명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불순한 의도와 애매모호한 공기와 어설픈 인간들의 몸동작으로 인해, 때로는 우매해 보일 만큼의 반복 동작들- 작전명에 가려진 세계의 허술함과 우매함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가면은 단순화된, 상징적인 이미지를 통해 작전명이라는 텍스트를 대변하는 것이 되었어. 그렇다면 이렇게 가면을 쓰는 건 누구의 힘을 획득하는 과정이지? 가면이라는 이미지를 쓰면서 그 안에는 무서운 정치적 함의와 권력과 잔인함이 내포되어 있는 걸 알아채는 걸까? 그래서 가면 하나만 쓰고, 비닐봉지 따위의 무언가를 뒤집어 쓰고도 캐릭터들은 자신이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는 걸까. "자살한 왕들"이나 "아이스버그"가 되었다고 말이야. 그 순간만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또 남을 믿으려고 애쓰는 걸까.
믿으려 했다기 보다는 책임을 공유하려 했다고 본다. 1차적으로는 이 퍼포먼스를 실현시킨다는 책임, 어쨌거나 판은 벌어졌고 각자가 이 판에 던져졌으며 마무리는 지어야 할 테니까. 2차적으로 퍼포먼스의 당위성 혹은 의미를 구현해 보겠다는 책임 말이지. 간단 명료한 목적과 스크립트와 규칙으로 구성된 "공동의 놀이"라는 건 어떤 이유로든 모여진 일군을 담합시킨다는 힘이 있다. 구성체의 바깥과 안의 구별이 확연히 그어지면서 생기는 어떤 마법과 같은 몰두와 공동체성. 그러나 이 놀이에 특별한 점은 참여자-퍼포머들이 결코 놀이에 절대적으로 몰두할 수 없다는 모순된 사실에 있다. 가면은 비정상적인 동작에 대한 표식이지 완벽한 가리개는 아니었다. 놀이를 지켜보는 카메라가, 도시 공간의 공백과 보행자들이 있었다. 놀이의 목적은 거대하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불분명했다. 작전명을 재현하는 나의, 우리의 몸짓을 통해서 어떠한 의미를, 힘을 길어낼수 있는 거야 라는 질문만이 이 가면 놀이에 의미를 가져다 주는 방식이었다고 말하는 게 옳은 지도 모른다. 한편 제 행위와 행위가 표시하는 작전과의 무지막지한 간극, 그리고 행위에 따른 웃음과 잡담들은 이상한 공허함을 불러 왔는데. 다시 이 공허함을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가라는 데서 누가 놀이의 힘을 쟁취하며 누가 놀이의 힘에 굴복할 것인가라는 답이 나오는 게 아닌가 한다. 공동체성에 따른 책임은 따라서 단순히 놀이에 참여한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세계의 어떤 일부를 향해 있었노라고 말할 수 있겠지. 이렇게 해서 이 퍼포먼스는 정치적 참여의 한 형식을 띄게 된다!
도시의 공터나 건물 앞 골목을 '점유' 하면서 벌이는 행위를 통해 이들은 놀이라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주는 경계에 선다. 이 집단에겐 무기력하면서 엉뚱해 보이고, 알 것 같으면서 모를 것 같은 '모호한 다성성'이 존재하게 된다. 연기를 하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죄수, 낭인, 광인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아이도 아닌 것이 어른도 아닌 것이, 사람도 아닌 것이 동물도 아닌 것이 어떤 경로와 패턴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주체적인 행동력을 갖고 있는 개인인지 의문이 드는,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처럼도 보였다.
실재화의 도상
그들 뒤로 멀리, 그리고 높이 불빛이 타오르고 있다.
그 불과 이 죄수들 사이에는 길이 가로지르고 있는데, 그 길을 따라 인형극 무대와 같은 벽이 있다.
그 위에서 관객 앞에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벽 말이다.
그는 말하길,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벽을 따라 사람들이 그 위로 온갖 종류의 다양한 도구들과, 여러 가지 인물 상 및 동물상들과,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변형된 돌과 나무의 이미지를 옮겨가는 걸 상상해보라.
그들 중 어떤 이는 걸으며 말하고 어떤 이들은 침묵하고 있다.
그는 말하길, 이상한 비유를 하시는 군요; 이상한 죄수들이네요.
- 플라톤, <국가>
생명의(vital) 속성들은 결코 완전히 실재화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실재화의 도상에 있다. 즉, 이것들은 상태들이라기보다는 경향들이다. 목적을 위해서 예술은 눈에 보이는 선들 뒤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운동을 찾으려 하고...
-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1944)
뉴스 속의 시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한밤중 시골 마을에 갑자기 동네 스피커에서 굉음이 울린다. 들판을 향해선 헤드라이트 불빛이 쏟아지고, 마을 주민은 양동이를 두드리며 악을 쓴다.
-'밤마다 농심 할퀴는 야생동물 습격사건' 에서 인용, 배명재 기자, 경향신문, 2009년 9월 6일
뉴스의 말하기와 예술작업의 말하기 방식 중에서 작전명은 어디에 더 가까울까. 우리가 이메일을 통해 나누었던 대화의 조각들 중에서 우리는 대통령이 두 명이나 죽어가는 일을 비롯한 수많은 야생적인 사건들이 '뉴스 속의 시'처럼 우화되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이야기의 배경을 만들고 무대장치를 지어내고 결말을 위한 서곡을 지어낸다. 노래는 들리지 않고 이미지는 프레스가 찍은 사진뿐이지만 들리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무수히 많은 단서들이 그 안에 배경막처럼 깔려 있다. 뉴스 속의 시를, 죽을 때까지 마주해야 하는 우리는 이미 정해진 감정의 틀에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걸까. 뉴스 속의 시에 관하여, 우리의 감정은 어디에서 어디까지 지배당하고 조정 당하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뉴스 속의 시라니 너무 웃긴다 깔깔깔, 살짝 미친 사람처럼, 뉴스 속의 시를 웃으면서 보고 있지만 답답하다. 그 수사의 세계가, 상식적이면서도 도무지 상식이라고 볼 수 없는 뉴스 속의 시들을 어떻게 봐야 하나. 집단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설명 체계를 구사하면서, 한편 짐짓 아닌 척 개인의 심사에 호소하고 있는 이 서정과 서사의 관계들이란.
어디에서 어디까지? 뉴스를 수용하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 얘기하고 있는 거지? 충격, 슬픔, 조롱 등의 "이미 정해진 감정의 틀"의 문밖 정도 머물고 있다고 할 그런 수용방식을 ‘뉴스 속의 시’라고 얘기하는 거지 우리가. 다시 말하자면 주어지는 "현실"에 대한 뉴으스. 이야기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 라고 묻는 거지? 남화연이 그러더군, 여러 다른 몸을 빌어서 진실의 여러 가지 얼굴을 공유하고 싶은 거라고. 뉴스가 전달하는 현실이 다면의 허/실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뉴스라는 내러티브에 사용되는 여러 단어들을 재조립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거겠지. 그런 행위를 통해서 또 다른 현실의 면을 창출해 내려는 거 아닌가. 여기서 문제는 그렇게 현실을 만들어내는 "시적" 활동의 방향성에 있다고 생각해. 부유할 것인가. 아니면 몇 만 가지 모습을 하고 있든 간에 그런 현실에 개입해서 현실성이라는 걸 구축해 나갈 것인가. 바로 <오퍼레이셔널 플레이>라는 작업 스스로 이 기로의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
90년에 도드라졌던 서울 미술계의 작가 군은 주로 부유하는 편이라고 봐. 그것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마지막 처방 혹은 희망의 끝자락이라는 듯이 부유하는 기호의 체계를 만들어서 그것을 조각화하고 도상화하는 방식 말야. 그래서 종종 허무하거나 자폐스러운 "몸짓"을 보이게 되는 것은 아닌지! 가령 "우리는 행복해요"(박이소) 과장된 이 문구의 정서적 자장은 크지만 그 정서가 어떤 식으로 현실에 참여할 수 있는 힘을 일어내는 지는 잘 모르겠다. 정서를 "찌름으로써" 파장되는 뭔가가 있을까. 현실의 진정한 모습, 그 진실이 있다고 믿을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여러 다른 얼굴과의 대화나 협상에 보다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러면 작가적 정서나 비평의 표현법으로서의 작업보다는 작가가 관계하는 현실의 체계와 그 물질들을,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놀이하는 방식과 과정을 공유하는 작업에 더 큰 희망이 있다고 본다. 소위 "리서치 베이스드 아트"라는 개념과 연계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겠지.
위치의 이동성* 1
얼굴에 빼곡하게 별문신을 새겨 넣고는 타투이스트(직업적으로 문신을 해주는 사람)를 고소한 소녀가 이 모든 것이 아버지가 무서워 자신이 꾸며낸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했다.
벨기에에 사는 18세 킴벌리 블라맹크(Kimberley Vlaminck)는 얼마전 타투이스트를 상대로 170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자신은 작고 예쁜 별 3개만 새겨달라고 했는데, 언어가 서툰 타투이스트가 주문을 잘못 알아듣고는 한쪽 얼굴에만 별 56개를 새겨넣었다면서 문신을 지우는 수술비용을 요구한 것. 소녀는 당시 “문신을 하는 것이 생각만큼 아프지 않아 도중에 잠이 들었고 깨어났을 땐 왼쪽 얼굴에 별이 56개나 새겨져 있었다.”면서 “길거리를 다닐 때마다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블라맹크는 2주 만에 이 모든 것이 자신이 꾸며낸 말이라고 고백했다.
- '얼굴에 56개 문신 소녀 거짓말 고백' 에서 인용, 강경윤 기자, 서울신문 나우뉴스, 2009년 6월 24일
"시적 활동의 방향성"을 작가가 제대로 갖기 어려운 이유는 '나'라는 작가의 정체성 문제와 따로 뗄 수 없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민중미술 작가들이 겪었던 가장 큰 문제는 현실에서 혁명이나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가를 잘 못(또는 잘못) 짚어서가 아니었듯이. 정치적/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발언을 위해 현실을 재현하고 차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잡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치적/사회적 현실에 대한 소위 '진정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작가 자신이 민중이 아닌데 자기 자신을 민중과 동일시하는 데에서 오는 함정에 빠졌기 때문인 것이라는. 이 함정은 작품이 도식화되고, 한마디로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재미는 아마도 감정적인 움직임에 가까운 것일 테다. 그러니까 "시"를 보면서 느끼는 정서적인 울림에 기반한 흔들림,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미의식 같은 것에 대한 정신을 보유한 것이겠지. 그래서 자신 혹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표현하는 데 홀로 몰두하고 마는 작업보다 방식과 과정을 공유하고 놀이하는 작업에 더 큰 희망이 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데리고 놀 것이냐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데리고 놀기'의 필연성을 현실에서 발견하고 자기의 "타투"를 새기고자 하는 작가들은 위 기사의 블라맹크처럼 (현실을) "꾸며내는 일"에 직면한다.
그래서 부유할 것이냐, 참여하게 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가 말(내용, 의미)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나의 위치 짓기'다. 혼자 부유하고 말것이냐 아니면 너와 내가 함께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줄 것이냐, 아니면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이렇게 부조리한 현실에서 부유하고 있는데 다른 현실성을 만들어볼래? 라고 조금 더 도전적으로 말해보는 데까지 갈 것이냐 하는 층위(layer)가 있다. 부유하는 작업들을 보면 맥이 빠지기도 하지만, "우리는 행복해요"를 보고 환호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인 체 하는 어른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복'의 가능성이었다고 기억한다. 근육을 불끈 쥐어야만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은 아니니까. "최소한의 개념을 통해서 최대한의 효과"를 내고자 하는 작업이 굉장히 정치적일 수 있다는.
그런데 이러한 차용을 포함한 아이디어, 개념 발상에 기반한 작업에도 한계가 왔다고 보진 않나. 서로 다른 정서 그룹의 간격은 멀어져 가고, 브레히트적 소격 효과나 아이러니를 수용할 수 있는 정서 그룹이라는 것 또한 극히 제한되어 있다고 본다. 게다가 "환호"가 암시하는 전복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글쎄 그 환호가 "흥"에 가까운 것이었는 지, 아니면 정서적 짜릿함에 관한 것이었는 지 다시 한번 재고해 볼 수 있을까. "우리는 행복해요"를 무효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시절"을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참여의 방식을 재고해 보자는 거다. 리서치와 (공동) 구축의 방안을 탐험해 보자!
공주: 버리는 게 아니라 백성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미실: 그게 버리는 겁니다. 그걸 버리고 어찌 통치를 하려 하십니까
공주: (그러한가)
미실: 예 공주님. 우리는 정쟁을 하고 있습니다. 정쟁에도 규칙이 있는 것입니다. 이건 규칙 위반입니다. 도대체 무엇으로 백성을 다스리려고 하는 겁니까
공주: 진실이요.
미실: ...무슨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까. 백성들이 새로운 천실황녀라 공주님을 외치고 있습니다.
공주: 격물이나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것이며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진실을 밝히려는 격물을 가지고 마치 세주께서 천기를 운행하는 듯한 환상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미실: 백성은 환상을 원하니까요. 가문에 비를 내리고 흉사를 막아주는 초월의 존재를 원합니다. 그 환상을 만들어 내야만 통치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공주: 아니요 백성을 희망을 원하는 겁니다.
미실: ...백성이라는 것이, 군중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십니까. 군중의 희망, 혹은 욕망, 이런 것들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모르시지요?
공주: 예 전 무섭지 않습니다. 적어도 백성이란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원하는 것이지 환상을 원하는 게 아니니까요.
미실: 백성은 왜 비가 오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백성은 일식이 어찌 일어나는 지 알고 싶습 않습니다. 누군가 비를 내려주고 일식이라는 흉사를 막아주면 그만인 무지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입니다.
공주: 그건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실: 예 모릅니다. 알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뭘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공주: 백성들이 책력을 알면 스스로 절기를 알게 되고 스스로 파종할 때를 알게 됩니다. 그리되면 비가 왜 오는지는 몰라는 비를 자신들의 농사에 어찌 이용할 수 있는 지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한 발짝씩이라도 더 나아가고 싶은 게 백성입니다.
미실: 안다는 거, 지혜를 갖는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에게 안다는 것은 피곤하고 괴로운 일입니다.
공주: 희망은 그런 피곤과 고통을 감수하게 합니다. 희망과 꿈을 가진 백성은 신국을 부강하게 할 것입니다. 저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 그런 신라를 만들 것입니다....(내가 하고 있는 말이 맞는 거야?)
미실: 미실은 백성들의 환상을 얘기하고 공주께서 백성들의 희망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허나 그 꿈이라는 것이, 희망이라는 것이 가장 잔인한 환상입니다. 공주께서는 이 미실보다 더 간교합니다.
- MBC특집 드라마 <선덕 여왕> 29회(2009년 8월 31일 방영) 중에서
그런데 고승욱 작가의 작업은 어떻게 생각해? 부유하는 걸까? 행동하는 걸까? 그가 공공미술이나 사회참여적 활동에 혼신을 다하는 걸 봤는데, 막상 작업은 부유하는 개인 그 자체만을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바보 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랄까. 자폭 유머를 통해 공동의 정서적 연대를 형성하는 것일까.
각주* "위치의 이동성"은 남화연의 꿈에 나타난 그의 논문 제목이라고 함.
법과 질서
21일 미 뉴욕 맨해튼의 연방지법에 파란 죄수복을 입은 10대 소말리아 소년이 걸어 들어왔다. 왼손에는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AP통신은 "미국 역사상 100여년 만에 처음으로 열리는 해적 재판"이라고 보도했다.
소말리아 해적 압디왈리 압디카디르 무사이는 지난 8일 소말리아 인근 해상에서 미국 컨테이너선 머스크 앨라배마호의 선장 리처드 필립스(Phillips)를 납치한 후 4일간 미군과 대치했다가 붙잡혀 20일 밤 뉴욕으로 압송됐다. 이날 재판에서 해적 행위, 납치 공모 등 5개 혐의로 기소됐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은 "유죄 선고를 받으면 종신형이 유력하다"고 보도했다.
무사이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오른손을 들어 선서하라고 하자, 수업시간에 손 들듯 오른팔을 완전히 위로 올렸다. 법원이 선임한 변호사가 통역을 통해, 무사이의 아버지가 전화로 무사이의 나이를 확인해 줄 것이라고 알려줬다. 그 말에, 무사이는 얼굴을 손에 파묻고 울었다.
재판의 쟁점은 무사이의 나이. 성인 여부에 따라, 선고 형량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는 자기 나이를 처음에는 16세라고 밝혔지만 19세, 26세 등 계속 말을 바꿨다. 결국 판사는 검찰측 주장대로, 법적 성인으로 분류되는 '18세'로 결론 내렸다.
그의 어머니 하산(Hassan·40)은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아들은 그보다 나이가 많은 불량배들에게 세뇌됐다. 그는 (돈을 벌 수 있다는) 꼬임에 속았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도 "아들은 맏아들로서 1993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무사이의 나이는 16세다.
이 소년 해적은 "평생 미국에 가보는 게 소원"이라고 머스크 앨라배마호 선원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를 미국 법정에 직접 세우는 것에 대해, 소말리아 정의옹호센터의 오마르 자말(Jamal) 사무총장은 "무사이는 무법천지인 나라에서 하룻밤 새 최고의 사법 체계를 갖춘 미국에 내던져져 혼란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 '미 (美), 해적 잡아 법정에 세웠지만…'. 원정환 기자, 조선일보, 2009년 4월 23일
작업의 의미를 작가의 언어로 표현해 주시요 라는 요청에 그녀는 이렇게 응답했다.
시작은 세상의 어법(본래의 모습을 은폐한 수사들)을 충실하게 배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과장된 문장으로 이상한 이야기를 만들어 결국에 세계가 구사하는 어법의 이상함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죠. 이것은 좀더 생각해서 다시 나누고 싶어요.
- 저자들과 남화연과의 대화로부터
"세계가 구사하는 어법의 이상함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그러니까 시작일 뿐이다. 그 이상함은 예민한 직관만으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세계라는 의미는 점점 팽창하여 다층화, 다각화하고 있다. 이 팽창의 힘은 무엇보다 미디어-트랜스 내셔날 자본주의에 있다. 그런 세계를 수용하는 "개인"의 능력에 대한 도전은 과연 과도하다. 혼란, 절망, 무기력, 무지의 상태 등등은 존재의 조건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조건으로부터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까? 이 조건을 요리하는 방법은? 여기서 요리라 했음은 (조건을 구성하는) 재료를 살리되 동시에 변형하는 하나의 다른 맛나고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실체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왠지 <장기하와 얼굴들>이 생각나는데!)
법과 질서의 양가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팽창하는 사회를 조절하는 도구로서 법과 질서가 "판친다". 여기서 판친다라는 동사의 사용은 의도적이다. 보통 "무질서가 판친다"라고 하니까. 그러나 질서와 법 역시 판친다. 그 추상적인 뻣뻣한 기제가 개인의 변덕과 만나 판치는 형세들은 과연 부조리하다. 뉴욕에서 하루 유치장에 갇혔다는 남화연의 일화가 그러하고 압디왈리 압디카르 무사의 일화가 그러하다.
"이것이 이곳의 법과 질서다". 남화연의 <오퍼레이셔널 플레이>에 삽입되는 구절이다. 텍스트에서 마치 이 문장을 선언하는 듯한 여왕의 몸짓을 그린 드로잉이 함께 했었지. "적"의 몸짓을 따라해 보는 거지 그러면서 적에 동등한 어떤 힘을 과시해 본다고 할까 혹은 적의 힘을 축소해 보려는 시도? 적을 알아야 무찌르지!
혹은 어린애가 막대기 짚고 뒷동산에 오르고 있는데 마음속으로 자기는 에베레스트나 기암괴석에 오르고 있다고 착각 또는 확신하는 걸 그려보자. 그것처럼 그냥 ‘이것이 이곳의 법과 질서이다' 라고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데 그것에 화들짝 놀라서 얼굴 가리고 다들 무서워하면서 자신들의 허술한, 하지만 정교한 채 하고 있는 법과 질서의 무지(혹은 무질서)에 대하여 벌벌 떨고 있는 그런 이상한 그림.
군사작전이라는 "저 먼 곳의" 평행하는 현실. 그리고 이 군사작전에 대한 대중적 공유를 위한 마련된 장치의 일환으로 주어진 명칭. 이 명칭을 가면과 동작으로 번역해서 놀아본 것도 그런 현실과 동일한 로직(logic)이겠지. 이 반복을 통해서 생각과 의심과 질문이 컨덴스된 그런 놀이를 공동으로 펼치면서 작전의 공동성에 대응하는 공동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고 할까.
위치의 이동성 2
<오퍼레이셔널 플레이>의 유트레히트-서울에서의 퍼포먼스를 기록,편집한 비디오와 더불어 작가는 이들 작전의 장소를 가리키는 지도, 도시 풍경과 점멸하기를 반복하는 교통 표지판과 라이트들을 배경으로 서울의 한 옥상에서 펼쳐치는 솔로 댄스를 촬영한 <핑핑핑>이라는 비디오 작업을 선보인다. 전시장에는 작전명과 텍스트(스크립트)를 슬쩍 끼어넣었다. 도대체 이 식객들은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는가?
제 3세계로 가는 코트를 입고
제 3세계로 가는 지퍼를 타고
제 3세계로 가는 소매를 돌아
제 3세계로 가는 치마를 입고
제 3세계로 가는 모자를 지나
제 3세계로 가는 장갑 사이로
제 3세계로 가는 구두를 신고
길고 좁다랗고 캄캄한 터널에 쌍둥이 경찰 3&4의 노래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남화연의 <제 3세계로 가는 심포니Third World Symphony> 2악장(Second movement) ‘이상한 옷을 입고’ 중에서
"세계"라는 개념은 날로 추상화하거나 배타적이거나 우둔하거나 일그러지고 있다. 그럴 때. 개인들은 자기의 도상, 자기의 위치와 가면과 놀이하지 못하고 고착되거나 부유한다. "세계가 구사하는 어법의 이상함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그러니까 결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개인이 부유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이상함을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래서 이 퍼포먼스가 가진 '참여'의 의미에 한 표를 던진다. 하지만 <오퍼레이셔널 플레이> 퍼포먼스가 정치적 참여의 한 형식을 띄게 된다는 문장 끝에 나는 느낌표(!) 와 달리 물음표를 붙이려 한다. 공동의 놀이가 저 밖의 세계에 던지는 현실적 각성과 실행을 가능하게 할 지의 여부는 그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손에 달려 있기에. "선생이 아니라 엉뚱한 교생" 으로서 지식의 확장을 꿈꾸는 작가는 기존 현실이 만들어낸 사건을 직접적이든 우회적으로든 (비)웃게 만든다. 그것이 혼자 하는 헛발짓이나 야밤에 불어제끼는 피리 소리가 되고 말지, 역사와 현실을 리서치해 눈에 보이는 참여로 만들지 결정하는 건 다른 대리인들(agency)과의 협업이다.
<오퍼레이셔널 플레이>가 '작전하는 희곡'인 동시에 '작동하는 놀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가진 것처럼 이 퍼포먼스에는 역할(힘을 가진)의 분배와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놀이가 병행한다. 남화연은 "작가가 아닌 작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위치를 이동하며, 세계를 바라보고 경험하는 눈높이 자체를 오르내리며 "이상함"을 극대화해 보는 태도일 수 있겠지.
제각각 모두 다른 공간에서 다른 자신의 이름으로, 현실에 발을 디딘 개인들의 참여를 구축해내는 출발은 '나와 같지 않은 것들을 알아가는 것'이다. 내가 직접적으로 겪지도 않은 전쟁, 참사, 계급 투쟁 등등. 내가 아닌 '나의 밖'을 아는 것은 때로 무섭다. 아는 것으로 말미암아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누가 나를 알아간다면 나는 그에 대응하는 방어기제를 만들기도 한다. 아는 것의 층위를 벗어나 때로는 모른 체 하기도 한다. '아는 것' 자체를 무효화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현실을 흐뜨러트리기는? 지금 필요한 건 '안다는 것'의 개념 자체를 확장하는 것 아닐까? '안다는 것' 자체에 대한 리서치로 여러 리서치들이 흥미롭게 놀이를 펼치고, 파도 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아이디어, 개념 발상에 기반한 작업이 지금 의미 있으려면 '이것봐, 세상은 이렇게 어처구니 없다' 를 벗어나야겠지. 재확인 대신, 마음을 들뜨게 하고 산란하게 하여 그 이유를 궁금하게 하는 것을 우리는 보고 싶다.
작전의 공동성에 대응하는 공동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지도로 남았다. 지도에 관하여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인용한 <리어왕>에 대한 구절을 재인용하고 싶다. 지도를 만드는 행위는 이곳의 법과 질서를 단순한 기호로 치환시키는 행위다. 대중과 공유하기 쉬운 시각화의 방식으로 자리잡은 관습적 지식 체계이다. 지도는 위치의 이동성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다. 그리고 과 질서, 힘의 싸움에 대한 결말을 적은 그림-텍스트다. 우리는 지도를 보고 다른 세계를 탐한다.다른 세계를 알아가고, 그곳에 놀러도 가고 싸우러도 간다. 지도를 만드는 사람에 따라 구체적인 현실은 크기가 다른 점선면으로 추상화된다.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1962)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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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카토르 투시도법을 고안해낸 16세기, 지도는 역시 진기한 물건이었으며 그것은 권력과 부를 눈으로 확인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의 구실을 하는 것이었다. 콜럼버스는 항해사가 되기 이전에 지도 제작자였다. 공간이 마치 획일적이고 연속적이라는 듯이 직선을 따라 똑바로 나아갈 수 있다는 발견은 르네상스 시대 인간의 인지 양식에 있어서 주된 변화의 하나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지도가 리어왕의 주된 주제, 말하자면 그의 지도 위에서의 시각상의 분할이 실제 영토의 분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세익스피어는 <리어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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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가슴속에 품고 있던 계획을 말하겠다.
지도를 다오.
우선 나는 내 왕국을 3등분해 놓았다.
그리고는 “나는 왕이라는 명칭과 명예만을 보유하고" 라고 덧붙였다.
"이것이 이곳의 법과 질서다"라고 선언하는 여왕은 이 왕을 흉내내고 있다. 그리고 주저한다. 지도는 실재인가 아니던가. 그것은 실재와 모호한 관계를 유지한다. 선별할 만한 장소가 있는가 하면 방향조차 파악할 수 없기도 하다. <핑핑핑>의 표지판과 댄스는 "법과 질서" 에 길들여진 지식에 눈 먼 우리들의 감각을 자극하고 새로운 지식을 쫓으려 하는 우리의 몸짓을 흉내낸다. 그 몸짓은 아직 고독하다. <오퍼레이셔널 플레이> 이후 남화연과 함께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가 여기서 반짝반짝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의미 있기 위해 우리는 알고 싶다. 알고 싶기에 우리는 의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