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September 17, 2009

편집을 위한 practice

/기사 등 몇개는 빠져있을 수도।

/몸짓->뉴스 속의 시 ->법과 질서->돌진과 자폭

/물론 맞춤법 등 다듬어야겠지만। 우리의 구어체와 문어체가 섞여있는 것도 좋은 것 같은데।

몸짓
워키토키가 2차 세계 대전 때 만들어진 기술이라---워키 토키에 특별한 어법 있잖아. 우리가 그 어법을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 워키토키에 적합한 다른 어법이 있는 지 모르겠어. 이런 의향만은 분명해. 교육과 배경에 상관 없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을 우리가 써내려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인용으로 시작한다. 영국 출신의 인류학자 사회학자 싸이버네틱스 이론가 그래고리 베이트슨. 현재 출처는 모르겠음.

"그러니까 완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언어가 다른 그 무엇 보다 바로 몸짓.제스쳐의 체계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말입니다. 동물들에게 제스쳐와 목소리의 톤 그게 전부죠. 단어라는 건 후에 고안된겁니다. 아주 후에. 그리고 그 동물들이 "스쿨마스터"를 고안해 낸거죠.
I tell you - we have to start all over again from the beginning and assume that language is first and foremost a system of gestures. Animals after all have only gestures and tones of voice - and words were invented later. Much later. And after that they invented schoolmasters. - Gregory Bateson"http://www.artandeducation.net/papers/view/1

이정우씨의 비전문 참여 퍼포들의 "곰팔배짓"이 불편했다는 짤막한 코멘트를 들으면서 양가적이 감정이 들었지. 이 사람이 중요한 지점을 읽지 못하는 구나. 그리면서 동시에 뜰끔. 만약 아주 전문적인 몸짓과 동작과 코레오 그래피였다면 작품이 더욱 힘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단련된 근육과 동작이 전혀 환상적일 것 없는 "미지의 세계"와 대면할 힘으로 주어질 수도 있었다라는 스펙큘레이션. 중요한 지점은 이 프로젝트가 단어 어떤 단어로 구성된 텍스트로부터 시작했으며 이 텍스트를 동작시키는 과정으로서 곰팔배짓이 갖는 의미에 있지. 텍스트를 흔들어서 의미화하는 과정을 포착해 주었다고 할까.


아이스버그, 자살한 왕들의 연기는 다들 무용인지 무술인지 댄스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지। 그들의 연기는 영화나 무용이나 비디오나 어떤 예술 장르에 수용되기에는 기막히게도 어설픈 것이었다। 하지만 이 어설프고 덜 다듬어진 것들은 이 급작스러운 퍼포먼스를 기록하게 하는 유용한 대화방식 아니었을까। /대화라는 것이 언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주변 공기와 상황, 카메라가 돌아가는 현장, 그리고 '자 도세요। '됐습니다/ '왼쪽으로 가세요, 아니오 오른쪽으로요' 라고 말하는 카메라 감독의 말이 들려오는 모든 현실상황이 뒤범벅된 활동들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런 리얼리티에서 이들은 정말 숙련된 연기자인 것처럼 연기할 수 있었을까?/난 그 어처구니 없는 몸동작이, 웃음이 터져나올 만큼 괴상한 짓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 몸동작, 하지만 과장된 행동이라고는 여왕(네덜란드)의 표정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그 나름 소박한 군더더기 없는 그 행동들이 이 작업의 주요한 표현법이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이들은 가면이나 아주 간소한 소도구들만을 통해서 이 희곡에 불려져 나온 거야। 이들에게는 그 어떤 성품이나 기존의 연기력, 몸짓, 독특한 몸의 동작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필연성'이란 중요하지 않아। 이들에게 작전명이라는 캐릭터는 그냥 떨어진 거니까। 실제 수많은 전쟁과 살육과 정치적 사건들이 폭탄처럼 방향은 정확하지만, 그 방향의 근거가 터무니없이 우발적인 데에서 피어난 것이 많은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이들이 각각의 작전명-캐릭터를 잘 짜여진 이미지로서 잘 구현해야 할 이유는 정말 없는 거지। 이들은 하지만 기어이 자신의 연기를 끝마치기 위해 노력하지। 왜냐하면카메라가 쉴 때, 아니 정확히 쉴 때가 나오진 않지만, '컷' 하고 난 후의 이들이 몸이 좀 더 긴장이 풀어졌다는 걸 알 수 있잖아। 그러니까 이들 연기자들은 최소한 가면’에 적응하기। 정도의 노력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어। 어린아이가 어른의 말, 어른들이 짜여놓은 질서를 흉내내려고무의식중에 애를 쓰는 것처럼। 만약 정말 숙련된 기계체조선수나 무용가가 이 희곡을 구현한다고 했다면, 그건 정말 무대연극에서의 공연같은 한정된 시공간을 허락하는 예술장르로 보여졌을 거야। 그렇다면 그 시공간에 각각의 캐릭터를 부여받은 인물들이 급작스러운 퍼포먼스를 벌이게 되는 걸 '기록'하는 의미도 줄어들었을거야। 공연은 뭐랄까। 공연이 짜여진 희곡에서의 계획적인 연출을 드러낸다면, 지금 이 사람들의 이 희한한 연기 패턴은 더욱 이 작업의 구조, 나아가 작전명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 같아। 구현되는 방식은 꼭 작전! 처럼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 불순한 의도와 애매모호한 공기와 어설픈 인간들의 몸동작으로 인해, 떄로는 우매해 보일만큼의 반복 동작들- 작전명에 가려진 작전의 허술함과 우매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여기서 가면은 단순화된, 상징적인 이미지를 통해 작전명이라는텍스트를 대변하는 것이 되었어। 그렇다면 이렇게 가면을 쓰는 게 얼마나 힘이 있지? 누구의 힘을 획득하는 거지? 우리는 가면이라는 이미지를 쓰고 있지만, 그 이미지 안에는 무서운 정치적 함의와 권력과 잔인함 등등이 다 내포되어 있는 걸까? 그래서 그 가면 하나만 쓰고, 비닐봉지 따위의 무언가를 뒤집어 쓰고도 각 캐릭터들은 자신이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는 걸까। 자살한 왕이나 아이스버그가 되었다고 말이야। 그 순간만은। 그 공동체 안에서।

몸짓2
몸짓의 문제에 관하여 지금 출연진들의 방식이 १००% 옳았다고 확언하는 건 결과론적인 첨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잘 짜여진 안무와 단련된 근육의 힘이 보여주는 또 다른 대면의 힘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다시 떠올려보며,윌리엄 포사이스의 사이키델릭한 몸동작과, 스판 재질로 몸에 딱 붙은 에어로빅 의상이 주는 완결된 미감은 정말 최고였으니까। 그렇다면 몸짓이 허술해서 더 작업의 의미가 부합되었다-가 아니라, 이들의 몸짓들!(복수)이 집합적으로 보여주면서내게 건드리는 미감과 현실에 대한 각성이 있었다는 것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그러니까 곰팔뱃짓을 하는 개인이었다면 문제는 달랐을 것 같다। 이들이 도시의 공터(서울) 혹은 건물 앞 골목을 '점유' 하면서 벌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들이 집단으로 이렇게 각각의 단련되지 않은 연기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들의 행위는 놀이라는 또 다른 인간의 속성/을 보여주는 경계에 서게 되는 것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라는, 그 집단이 굉장히 무기력하면서 엉뚱해보이면서 알 것 같으면서 모를 것 같은 '모호한 다성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곰팔배짓이 보여주는 지점이 생기는 것 같다.-그 지점은 동물들이 제스처와 목소리의 톤만을 갖고 있다고 언급한 애초 글을 시작하는 인용문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연기를 하는 이 사람들을 보면, 왠지 죄수, 낭인, 광인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도 아닌 것이 어른도 아닌 것이, 사람도 아닌 것이 동물도 아닌 것이, 물론 다들 너무도 분명한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은 어딘가 갇혀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주체적인 행동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하는,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뉴스 속의 시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한밤중 시골 마을에 갑자기 동네 스피커에서 굉음이 울린다.들판을 향해선 헤드라이트 불빛이 쏟아지고, 마을 주민은 양동이를 두드리며 악을 쓴다। " 우리가 나눴던 이메일에서 언니가 했던 말인 '뉴스 속의 시'가내게는 아주 또렷한 그림자가 되었어। 우리가 나누는 글이 어떤 교육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읽힐 수 있는 ' 글이 된다는 건 아주 중요한 코멘트 같아। 사실 아까도 플랫폼에 가서 서점에 들렸는데, 강수미(또 이름 나오네) 씨의 도무지 딱딱한 글 안에 들어있는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없었어।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중 2도 이해할 수 있게 해라"이 말을 나는 좋아하는 편은 아니고, 나 또한 쉽게 말하는 것을 혐오하는 쪽에 가까웠어।신문의 말하기와, 예술작업의 말하기 방식 중에서작전명은 어디에 더 가까울까।우리가 이메일을 통해서 나누었던 대화의 조각들 중에서우리는 우리의 대통령이 두명이나 죽어갈 때, 그리고 수많은 야생적인 사건들이 '뉴스 속의 시'처럼 우화되는 것들을 볼 수 있었어। 사람들은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이야기의 배경을 만들고 무대장치를 지어내고이야기의 결말을 위한 서곡을 지어내। 그러니까। 노래는 들리지 않고이미지는 고작해야 신문 프레스가 찍은 사진뿐이지만 무수히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단서들이 그 안에 배경막처럼 깔려있어।뉴스 속의 시를, 죽을 때까지 마주해야 하는 우리는이미 정해진 감정의틀에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걸까।뉴스 속의 시에 관하여, 우리의감정은 어디에서 어디까지 지배당하고조정당하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고 싶어।뉴스 속의 시가 너무 웃긴다 깔깔깔।살짝 미친 사람처럼, 뉴스 속의 시를 웃으면서 보곤 하지만답답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 수사의 세계가। 그 상식적이면서도,상식이 아닌 것도 같은 뉴스 속의 시들을। 집단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글이면서,짐짓 아닌 척 개인의 심사에 호소하고 있는 이 서정과 서사의 관계들।

실재화의 도상

생명의(vital) 속성들은 결코 완전히 실재화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실재화의 도상에 있다. 즉, 이것들은 상태들이라기보다는 경향들이다

목적을 위해서 예술은 눈에 보이는 선들 뒤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운동을 찾으려 하고

베르그송

그들 뒤로 멀리, 그리고 높이 불빛이 타오르고 있다.
그 불과 이 죄수들 사이에는 길이 가로지르고 있는데, 그 길을 따라 인형극 무대와 같은 벽이 있다.
그 위에서 관객 앞에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벽 말이다.
그는 말하길,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벽을 따라 사람들이 그 위로 온갖 종류의 다양한 도구들과, 여러 가지 인물 상 및 동물상들과,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변형된 돌과 나무의 이미지를 옮겨가는 걸 상상해보라.
그들 중 어떤 이는 걸으며 말하고 어떤 이들은 침묵하고 있다.
그는 말하길, 이상한 비유를 하시는 군요; 이상한 죄수들이네요.

플라톤 국가


뉴스 속의 시 2: 평행하는 현실과 가면쓰기
뉴스를 수용하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 얘기 하고 있는 거지. 충격, 슬픔, 조롱 등의 "이미 정해진 감정의 틀"의 문밖 정도 머물고 있다고 할 그런 수용방식을 뉴느 속의 시라고 얘기하는 거지 우리가. 다시 말하자면 주어지는 "현실"에 대한 뉴으스. 이야기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 라고 묻는 거지? 남화연의 그러더군 여러 다른 몸을 빌어서 진실의 여러 가지 얼굴을 공유하고 싶은 거라고. 뉴스가 전달하는 현실이 다면의 실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뉴스라는 네러티브에 사용되는 여러 단어들을 재조립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거 겠지. 그런 행위를 통해서 또다른 현실을 창출해 내려는 거 아닌가.

여기서 문제는 그렇게 현실을 만들어내는 "시적" 활동의 방향성에 있다고 생각해. 부유할 것인가. 아니면 몇 만가지 모습을 하고 있던 간에 그런 현실에 개입해서 현실성이라는 걸 구축해 나갈 것인가. "작적하는 희극"이라는 작업이 바로 이 기로의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

90년에 도드라졌던 서울 미술계의 작가 군은 주로 부유하는 편이라고 봐.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마지막 처방 혹은 희망의 끝자락이라는 듯이 그렇게 부유하는 기호의 체계를 만들어서 그것고 조각화 하고 도상화 하는 방식 말야. 그래서 종종 허무하거나 자폐스런 "몸짓"을 보이게 되는 거지.

"우리는 행복해요" . 과장된 이 문구의 정서적 자장을 크지만 그 정서를 통해 가능한 참여에의 힘. 나가가 배우고 알아 갈 수 있는 힘은 미약하다고 봐.
그러니까 우리는 "이민자 타투이스트"가 되고 싶은 거지, 킴벌리 블랑멩크가 아니라. 그렇다면 어떻게 기호들과 놀이할 수 있는 거야? 난 리서치와 배움과 콜레보레이션에 그 힘이 있다고 생각해. 거기에 대해서 좀 더 파보도록 하지.

뉴스속의 시
"시적활동의 방향성"을 제대로 찾기 어려운 이유는 '나'라는 작가의 정체성이라는 문제와 뗴려야 뗼 수 없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민중미술 작가들이 겪었던 가장 큰 문제는 현실, 리얼리티의 가장 혁명/변화가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가를 잘 못(또는 잘못) 짚어서가 아니라 그 정치적/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발언하기 위해 현실을 재현하고 차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잡는 데 실패했기 떄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정치적/사회적 현실에 대한 진정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작가 자신이 민중이 아닌데 '민중인 척' 하면서 민중을 그리거나, 자기 자신을 민중과 동일시하는 데에서 오는 함정에 빠졌기 때문인 것이라는। 이 함정은 내가 보기엔 거대한 게 아니라 작품이 도식화되고, 한마디로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재미는 아마도 감정적인 움직임에 가까운 것일 테다। 그러니까 "시"를 보면서 느끼는 정서적인 울림에 기반한 흔들림,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미의식 같은 것에 대한 실험정신을 보유한 것이겠지। 다시 거창하지 않게 말하면, 민중미술은 어느 순간부터 정말 보는 재미나 울림이 없어진 '말하기 방법만을 반복하는 작품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그래서 부유할 것이냐, 행동/참여하게 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빠지지 말아야 할 중요한 문제는 작가가 말을 내뱉고 말(의미)을 만들어내는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다시 '위치의 이동성'에서 말해야 할 부분인 것 같고) 그런 점에서 90년대 작업들 중 많은 부분이, 부유한다는 것에 나도 동의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나의 밖이라는 사회적 정치적 리얼리티에 관심있기 보다는 '나'라는 존재를 현실이라는 틀 안팎을 오가며 투사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일 거다। 정체성, '나'라는 말은 너무 많이 이미 많은 사람들이 했을 수 있지만। 혼자 부유하고 말것이냐 아니면 너와 내가 함께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줄 것이냐, 아니면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이렇게 부조리한 현실에서 부유하고 있는데, 다른 현실성을 만들어볼래? 라고 조금 더 도전적으로 말해보는 데까지 이를 것이냐 하는 레이어가 있는 것이다.
부유하는 작업들을 보면 맥이 빠지기도 하지만, "우리는 행복해요" 작업을 보고 내가 환호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인 체 하는 어른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복'의 가능성이었다고 기억한다. 근육을 불끈 쥐어야만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은 물론 아니니까, "최소한의 개념을 통해서 최대한의 효과"를 내고자 하는 머리 좋은 사람들의 작업이 굉장히 정치적일 수 있다는 .
남화연의 작업은 맞어, 그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해ㅣ(언니가 말한)
일단 부유하는 개인들을 흔들어놓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작업 과정에서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가면을 '내어주었다는 것', 두 도시를 가로지르며 그 가면들을 공유하게 했다는 것, 그것이 작전명이라는 정치/사회적 소재에 기반하며, 그 작전명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만들어내는 구조'/'현실의 의미를 시각화하는 언어의 방식'을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६।25를 재현하는 것보다 훨씬 큰 지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고승욱의 작업은 어떻게 생각해? 부유하는 걸까? 행동하는 걸까? 그 자신은 무지 엄청, 공공미술/ 사회참여 미술에 혼신을 다하고 있는데, 막상 작업은 부유하는 개인 그 자체만을 보여주고 있음। ㅋㅋ 바보같은 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랄까।

투사된 세계-습격들에 대항함
리얼리티를 (주관적으로) 지각하는 것과리얼리티를 반영하는 것의 차이
"우리가 떠올렸던 것과 같은 경험들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의 벽을 세우고 이로써 공간을 나눈다는 것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그림을 그리고 형태와 색채를 구성하는 것의 의미를, 혹은 시에서 단어와 운율로 우리들의 상황과 경험들을 묘사하고, 이렇게 혼돈된 세계의 습격들에 대항함을" 에르네스토 그라시, 예술과 신화
좋아하는 대목은
"그들 중 어떤 이는 걸으며 말하고 어떤 이들은 침묵하고 있다।그는 말하길, 이상한 비유를 하시는 군요; 이상한 죄수들이네요।""그러면 그 벽을 따라 사람들이 그 위로 온갖 종류의 다양한 도구들과, 여러 가지 인물 상 및 동물상들과,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변형된 돌과 나무의 이미지를 옮겨가는 걸 상상해보라।
이미지를 옮겨가는 걸 상상해보라। 이미지가 옮겨지는 것। 이미지 이미지। '작전하는 희곡'에 등장하는 동사들은 다 빙빙 도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동사들은 어떤 습격들에 대항하고 있는 걸까।플라톤 국가


법과 질서
작업의 의미를 작가의 언어로 표현해 주시요라는 요청에 그녀는 이렇게 응답했다.

"시작은 세상의 어법(본래의 모습을 은폐한 수사들)을 충실하게 배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과장된 문장으로 이상한 이야기를 만들어 결국에 세계가 구사하는 어법의 이상함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죠. 이것은 좀더 생각해서 다시 나누고 싶어요."

"세계가 구사하는 어법의 이상함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그러니까 시작일 뿐이다. 그 이상함은 예민한 직관만으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세계라는 의미는 점전 팽창하여 다층화, 다각화하고 있다. 이 팽창의 힘은 무엇보다 미디어-트랜스 내셔날 자본주의에 있다. 그런 세계를 수용하는 "개인"의 능력에 대한 도전은 과연 과도하다. 혼란, 절망, 무기력, 무지의 상태 등등은 존재의 조건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조건으로 부터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까? 이 조건을 요리하는 방법은? 여기서 요리라 했음은 (조건을 구성하는) 재료를 살리되 동시에 변형하는 하나의 다른 맛나고 살이되고 피가되는 실체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왠지 장기하와 얼굴들의 생각나는 데!)

법과 질서의 양가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사회, 세계의 팽창을 조절하는 도구로서 법과 질서가 "판친다". 여기서 판친다라는 동사의 사용은 의도적이다. 보통 "무질서가 판친다"라고 하니까. 그러나 질서와 법도 판을 친다는 것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그 추상적인 뻣뻣한 기제가 개인의 변덕과 만나 판치는 형세들을 과연 부조리하다. 뉴욕에서 하루 유치장에 갇혔다는 남화연의 일화가 그러하고 압디왈리 압디카르 무사의의 일화가 그러하다.

"사실은 어린애가 막대기 짚고 뒷동산 오르고 있는데 마음속으로 자기는 에베레스트나 기암괴석에 오르고 있다고 착각/ 확신하는 거 그것처럼 사실은 그냥 ;이것이 이곳의 법과 질서이다' 라고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데 그거에 화들짝 놀라서 얼굴 가리고 다들 무서워 하면서 자신들의 허술한, 하지만 정교한 채 하고 있는 법과 질서의 무지(혹은 무질서)에 대하여 벌벌 떨고 있는 그런 이상한 그림."

"이것이 이곳의 법과 질서다". 남화연의 작전하는 희극에 삽입되는 구절이다. 텍스트에서 마치 이 문장을 선언하는 듯한 여왕의 몸짓을 그린 드로잉이 함께 했었지. 네가 읽은 것과 반대의 순서로 나는 이 구절을 소화하고 있어. 그러니까 "적"의 몸짓을 따라 해 보는 거지 그러면서 적에 동등한 어떤 힘을 과시해 본다고 할까 혹은 적의 힘을 과소화해 보려는 시도?

군사작전이라는 "저 먼 곳의" 평행하는 현실. 그리고 이 군사작전에 대한 대중적 공유를 위한 마련된 장치의 일환으로 주어진 명칭. 이 명칭을 가면과 동작으로 번역해서 놀아본 것도 동일한 로직이겠지.


생각과 의심과 질문이 컨덴스된 그런 놀이. 그리고 그 놀이를 공동으로 펼치면서 작전의 공동성에 대응하는 공동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고 할까.


#. 법과 질서_힘 그리고 지도>”힘을 과시하고 적의 힘을 축소해보려는 시도”에 대해 말하자면 법과 질서에 깃든 ‘힘’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면을 쓰면서 가면을 쓴 퍼포머들이 어떤 힘을 획득한 것일까 질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법과 질서에 순응하거나 대응한다는 것은 결국 그 시스템이 저울질하는 ‘힘’의 판단에 자신을 밀어 넣는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것은 표피에 머물지 않는다. 이곳의 법과 질서 위에 서 있는 한 개인은 나아가 ‘힘의 쓰임’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므로 이곳의 법과 질서를 따르는 이들에게 ‘작전명’ 그리고 ‘작전’은 공범자로서의 가능성을 또한 덧씌우는 것이 아닐까.

>법과 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은 결국 힘에 의해서이다.(힘의 작동, 힘의 놀이) 붉은 색의 세모꼴 몸통을 갖고 쓰러지는 여왕의 ‘제스처’는 그런 점에서 언어의 가장 시발점에 위치하는 육감적인 행위이자, 언어의 가장 응축된 형태에 속함으로써 언어의 끝에 위치하는 선언문을 만드는 행위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갑자기 자살한 우리의 왕이 떠오른다-그는 가장 동물적인 행위를 통해 가장 고차원적인 언어로서의 의미를 남겼다.) *언어의 시작과 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맥루한의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오퍼레이셔널 플레이>에서 건드리고 있는 ‘말하기의 방식-말하기의 법과 질서’(화법의 다면성/다차원적 구조를 건드려보는 것)에 대한 역사적 전개 방식을 파편적으로 하지만 거대하게 조사한 책이기 때문이다.

>-“작전의 공동성에 대응하는 공동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은 결국 지도로 남았다. 지도에 관하여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인용한 ‘리어왕;에 대한 구절을 재인용하고 싶다. 지도를 만드는 행위는 이곳의 법과 질서를 단순한 기호로 치환시키는 행위다. 가장 대중과 공유하기 쉬운 시각화의 방식으로 자리잡은 관습적 지식 체계이다.

-먼저 맥루한은 말하길 “메르카토르 투시도법을 고안해낸 16세기, 지도는 역시 진기한 물건이었으며 그것은 권력과 부를 눈으로 확인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의 구실을 하는 것이었다. 콜럼버스는 항해사가 되기 이전에 지도 제작자였다. 공간이 마치 획일적이고 연속적이라는 듯이 직선을 따라 똑바로 나아갈 수 있다는 발견은 르네상스 시대 인간의 인지 양식에 있어서 주된 변화의 하나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지도가 리어왕의 주된 주제, 말하자면 그의 지도 위에서의 시각상의 분할이 실제 영토의 분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세익스피어가 <리어왕>을 통해 말하길
“지금까지 가슴속에 품고 있던 계획을 말하겠다.
지도를 다오.
우선 나는 내 왕국을 3등분해 놓았다”
그리고는 “나는 왕이라는 명칭과 명예만을 보유하고, “ 라고 말했다.

>“명칭을 가면과 동작으로 번역해서 놀아보는 것” 이 로직이

법과 질서 2: 알고 싶다
인류의역사는맑스의이론같이경제형태가주도하
는것이아니라지식인이헤게모니를쥔역사같다.
1. 봉건시대는농민은무식하고소수의왕과귀족그
리고관료만이지식을가지고국가운영을담당했다.
2. 자본주의시대는지식과돈을겸해서가진부르주
아지가패권을장악하고절대다수의노동자농민은
피지배층이었다.
3. 산업사회의성장과더불어노동자도교육을받고
또한교육을받은지식인이노동자와합류해서정권
24
을장악하게되었다.
4. 21세기들어전국민이지식을갖게되자직접적으
로국정에참가하기시작하고있다.
2008년의촛불시위가그조짐을말해주고있다.

- 고 김대중 대통령의 편찬된 일기 중에

버리는 게 아니라 백성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게 버리는 겁니다. 그걸 버리고 어찌 통치를 하려 하십니까
(그러한가)
예 공주님. 우리는 정쟁을 하고 있습니다. 정쟁에도 규칙이 있는 것입니다. 이건 규칙 위반입니다.
무엇으로 백성을 다스리려고 하는 겁니까
진실이요.
..무슨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까. 백성들이 새로운 천실황녀라 공주님을 외치고 있습니다.
격물이나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것이며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진실을 밝히려는 격물을 가지고 마치 세주께서 천기를 운행하는 듯한 환상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백성은 환상을 원하니까요. 가문에 비를 내리고 흉사를 막아주는 초월의 존재를 원합니다. 그 환상을 만들어 내야만 통치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아니요 백성을 희망을 원하는 겁니다.
..백성이라는 것이, 군중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십니까. 군중의 희망, 혹은 욕망, 이런 것들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모르시지요?
예 전 무섭지 않습니다. 적어도 백성이란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원하는 것이지 환상을 원하는 게 아니니까요.
백성은 왜 비가 오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백성은 일식이 어찌 일어나는 지 알고 싶습 않습니다. 누군가 비를 내려주고 일식이라는 흉사를 막아주면 그만인 무지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입니다.
그건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 모릅니다. 알고 싶습니다. 자신들이 뭘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백성들이 책력을 알면 스스로 절기를 알게 되고 스스로 파종할 때를 알게 됩니다. 그리되면 비가 왜 오는지는 몰라는 비를 자신들의 농사에 어찌 이용할 수 있는 지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한 발짝씩이라도 더 나아가고 싶은 게 백성입니다.
안다는 거 지혜를 갖는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에게 안다는 것은 피곤하고 괴로운 일입니다.
희망은 그런 피곤과 고통을 감수하게 합니다. 희망과 꿈을 가진 백성은 신국을 부강하게 할 것입니다. 저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 그런 신라를 만들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말이 맞는 거야?)
미실은 백성들의 환상을 얘기하고 공주께서 백성들의 희망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허나 그 꿈이라는 것이, 희망이라는 것이 가장 잔인한 환상입니다. 공주께서는 이 미실보다 더 간교합니다.

-선덕여왕 29회 중에서

돌진과 자폭
http://k.daum.net/qna/view.html?qid=3Iy9o

erberg says: (15:03:13)
구축주의와 사이키덱릭이 만나는 지점.
Icerberg says: (15:03:18)
거기에도 파워가 있는 듯.
seewon says: (15:03:24)
응응
Icerberg says: (15:03:27)
구축주의의 댄스 있잖아.
seewon says: (15:03:27)
아우!
Icerberg says: (15:03:31)
빅토리 오버 더 선.
seewon says: (15:03:33)
맞아요 ㅋㅋ
seewon says: (15:03:35)
응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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