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승욱, 노는 땅에서 놀기, 2001

민정기, 포옹, 1981
"시적활동의 방향성"을 제대로 찾기 어려운 이유는 '나'라는 작가의 정체성이라는 문제와 뗴려야 뗼 수 없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민중미술 작가들이 겪었던 가장 큰 문제는 현실, 리얼리티의 가장 혁명/변화가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가를 잘 못(또는 잘못) 짚어서가 아니라 그 정치적/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발언하기 위해 현실을 재현하고 차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잡는 데 실패했기 떄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정치적/사회적 현실에 대한 진정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작가 자신이 민중이 아닌데 '민중인 척' 하면서 민중을 그리거나, 자기 자신을 민중과 동일시하는 데에서 오는 함정에 빠졌기 때문인 것이라는। 이 함정은 내가 보기엔 거대한 게 아니라 작품이 도식화되고, 한마디로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재미는 아마도 감정적인 움직임에 가까운 것일 테다। 그러니까 "시"를 보면서 느끼는 정서적인 울림에 기반한 흔들림,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미의식 같은 것에 대한 실험정신을 보유한 것이겠지। 다시 거창하지 않게 말하면, 민중미술은 어느 순간부터 정말 보는 재미나 울림이 없어진 '말하기 방법만을 반복하는 작품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그래서 부유할 것이냐, 행동/참여하게 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빠지지 말아야 할 중요한 문제는 작가가 말을 내뱉고 말(의미)을 만들어내는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다시 '위치의 이동성'에서 말해야 할 부분인 것 같고) 그런 점에서 90년대 작업들 중 많은 부분이, 부유한다는 것에 나도 동의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나의 밖이라는 사회적 정치적 리얼리티에 관심있기 보다는 '나'라는 존재를 현실이라는 틀 안팎을 오가며 투사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일 거다। 정체성, '나'라는 말은 너무 많이 이미 많은 사람들이 했을 수 있지만। 혼자 부유하고 말것이냐 아니면 너와 내가 함께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줄 것이냐, 아니면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이렇게 부조리한 현실에서 부유하고 있는데, 다른 현실성을 만들어볼래? 라고 조금 더 도전적으로 말해보는 데까지 이를 것이냐 하는 레이어가 있는 것이다.
부유하는 작업들을 보면 맥이 빠지기도 하지만, "우리는 행복해요" 작업을 보고 내가 환호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인 체 하는 어른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복'의 가능성이었다고 기억한다. 근육을 불끈 쥐어야만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은 물론 아니니까, "최소한의 개념을 통해서 최대한의 효과"를 내고자 하는 머리 좋은 사람들의 작업이 굉장히 정치적일 수 있다는 .
남화연의 작업은 맞어, 그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해ㅣ(언니가 말한)
일단 부유하는 개인들을 흔들어놓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작업 과정에서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가면을 '내어주었다는 것', 두 도시를 가로지르며 그 가면들을 공유하게 했다는 것, 그것이 작전명이라는 정치/사회적 소재에 기반하며, 그 작전명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만들어내는 구조'/'현실의 의미를 시각화하는 언어의 방식'을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६।25를 재현하는 것보다 훨씬 큰 지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고승욱의 작업은 어떻게 생각해? 부유하는 걸까? 행동하는 걸까? 그 자신은 무지 엄청, 공공미술/ 사회참여 미술에 혼신을 다하고 있는데, 막상 작업은 부유하는 개인 그 자체만을 보여주고 있음। ㅋㅋ 바보같은 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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